위치 및환경

읍소재지에서 북쪽으로 6.5km 떨어진 농촌마을로 구봉산의 일맥이 남으로 뻗어 만든 팔양산 동쪽 기슭 해발 70m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고있다.

마을 앞으로 비옥한 성창들이 펼쳐져 있고 들 너머로 1972년 완공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며 마을 북족 한적골, 불무동에서 흘러나온 물이 마을 위쪽을 가로질러 고속도로 너머의 황룡강으로 합수 된다.

북쪽50m 거리의 배계마을과는 한마을처럼 연결되어 있고황룡강을 경계로 상오리와마주 보고 있으며 마을 서북쪽와룡재 너머가 부흥리이다.

마을유래

마을 북쪽 한절굴에 큰절이 있었다는 말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된 마을 인 것 같다.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 역면조에 대사리로, 1912년의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 북삼면조에 대사리와 기룡리가 각각 기록되어 있다.

일제때는 56가구로 이길수, 박정기, 정현식, 김종철은 징용에 다녀오고 징병으로 끌려갔던 안용술은 해방후 팔로군이 되었다가 6·25 발발 직전에 돌아와 6·25 직후까지 활약했다.

1950년 6월 보도연맹사건으로 7명이, 인공때 8명이 사망하고 음력 9월 9일 군인 입성후에 17명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1961년 물난리로마을 앞 하천이 터져 황룡강 물줄기가 현재의 위치로 바뀌면서 농토가 물에 잠기고 도로가 유실되는 피해를 입었으며 그후시작된 제방공사로 차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나 토지배상 문제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1972년 마을 앞으로 호남고속도로가 지나게 되었고 1970년 마을 북쪽에 장성댐이 완공됐다.

유물, 유적

야은재(향토문화재)와 영산홍(전라남도 보호수)

백계리 478변지에 소재해 있으며 원래 북하면 중평리에 있던 회계사의 강당건물로 1868년(고종5년) 훼철되자 당시 감역 김칠환이 살던 집을 야은 이용중이 매입한 후 현 위치로 이건하여 야은재로 칭했다.

정면 5칸 측면 초가지붕으로 1976년 향토문화재로 지정 됐다가 2003년 11월도지정문화재 242호의 자료로 승격됐다.

전남사적 318호로 이 건물 옆에 전남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약300년의 영산홍과 자산홍에 자웅을 이루어 봄철 꽃이 만발하면 야은재를 붉게 물들인다.

주인인 이진환은 이때를 놓칠세라 군의 유지와 친지들을 초청하여 꽃잔치를 벌여오고 있다.

이 건물 뒤쪽에는 수령 400년된 영산홍이 있다. 수고16m, 둘레4.6m, 면적153㎡이다.

나무 아래쪽 가지 활착이 좋으면 남부에 풍년이 들고 위쪽 가지 잎의 활착이 좋으면 북부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전라남도보호수 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설

신통력: 이서구가 목사로 부임해 마을을 지나다가 새가 지저귀는 것을 듣고 마을사람에게 “이곳에 종기논이 있느냐 거시샘이 있느냐 와룡산이 있느냐 봉상실이 있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여 “어찌 알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했다.

이에 이서구가 방금 새가 지저귀며 하는 말이 “종기논에서 나락 까먹고 거시샘에서 물먹고 와룡산 가서 쉬었다가 봉상실에 가서 잠을 자자”고 했다는 대답을 했다고 전하는데 일설에는 강감찬 장군이라고도 한다.

장성댐의 예언: 1940년 노스님이 근심어린 얼굴로 황룡교 위쪽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것을 남강 이영구옹이 연유를 묻자 “북쪽(남창골쪽)을 가르키며 저곳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를 막지 못하면 장차 이냇물이 핏물로 가득 할것”이락 한탄하였다.

그래서 그것을 막을 묘방을 물은즉 위쪽에 큰보를 막고 아래쪽에 글 읽는 소리가 나야 태평성대가 온다고 했다.

과연 6·25때 남창골에서 죽은 사람들의 피가 냇물을 물들였는데 5·10 선거때 북초등학교가 불에 타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고 위쪽으로는 장성댐이 들어서게 되어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길 것 이라고 한다.

남양마을사람들

지난 폭설로 쌓인 눈들이 겨울단비로 녹여주는 지난 30일 남양마을을 찾았다.

마을입구에 위치한 구 장성북국민학교가 ‘청산녹수’ 막걸리 공장으로 바뀐지가 벌써 7~8년쯤 지난 것 같다.

제일 먼저 이진환(75)씨의 사랑채인 야은재를 찾았다.

마침 이진환씨가 집에 계셔서 야은재와 영산홍의 위치를 알려준다.

올해 75세인 이진환씨는 장성문화원장을 역임했으며 실제 20년전까지 봄에 영산홍이 만개하면 기관장들을 야은재로 불러 만찬을 즐겼다고 한다.

이번에는 마을회관으로 발길을 돌려 본다.

마을탐방을 다니면서 시골마을을 둘러보면 마을회관에 남자들이 있는 풍경을 보기가 쉽지 않다.

부녀회장인 윤말례(73)씨를 비롯해 최고령인 지산댁 노화단(91)할머니, 경주가 친정인 경주최씨 경주댁 최금선(83)할머니, 북하댁 정순덕(82)할머니, 복흥댁 전용순(78)할머니, 자녀들이 미국에 있어 미국을 왔다갔다 한다는 서울댁 차유연(80)할머니가 둘러 앉아 반찬거리로밭에 심었던 도라지를 손질하고 있다.

35가구가 가족처럼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는 남양마을은 처음에는 큰절이 있어서 대사리 또는 기룡으로 부르다가 야은 이용중이 야은재가 황룡강변의 초당인데 마치 제갈공명의 와룡강변 남양조당을 연상 시킨다 해 이마을 478번지 초당 야은재를 남양초당이라 하였는데 그후 이용중 집을 남양촌이라 부르다가 점차 마을이름이 된 남양마을의 탐방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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