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년 전 남원 양씨 마을 입성해
사라진 용신제…기억 속으로
일제의 흔적, ‘일본식 가옥’ 보존돼

함평군 학교면 월호리 용호마을 전경

30함평 학교면 월호리

추위를 벗고 비로소 봄의 모습으로 갈아입은 듯한 4월.바쁜 일상 속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골 마을에 들러 쉬어 가보자.본지는 과거의 역사가 남아있는 마을에 찾아가 곳곳에 숨어있는 장소와 이야기들을 담아본다.

완연한 봄기운이 가득한 지난 19일 오후 함평군 학교면 월호리에 위치한 용호마을로 향하는 길에는 봄꽃이 만개했다.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영산강 강변도로의 넓게 펼쳐진 강이 가던 길을 멈추고 발길을 머물게 했다.

공사가 한창이라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니 나타난 용호마을. 과거 400~500여 년 전 양 근이라는 사람이 처음 이곳에 입성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남원 양씨 가문이 자가일촌한 이 마을은 현재 45가구 6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낮은 산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와지붕 주택들과 맞은 편 도로 논이 넓게 펼쳐졌다. 단조로워 보이는 이 마을에는 그저 스쳐지나갈 법한 장소에 재미있는 과거 흔적들이 남아있다.

[암 이무기의 저주를 풀다]마을 입구 도로에서 좀 더 지나치니 마을 동각에 어르신들이 쉬고 있었다.

마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양승호(85)씨를 만났다. 양 씨는 마을 설화 이야기를 꺼내며 “우리 윗세대 어르신들 계실 때만 해도 용신제를 지냈다고 들었어. 저그 산에 ‘용굴’이 있어. 지금은 무너져서 없는데 ‘용날’이라고 해서 굿도 하고, 제사 지내고 그랬지. 옛날에 사냥꾼이 저 산에 개들 데리고 용굴에 갔는데, 개가 무서워서 그런가 (굴에) 안 들어가려고 그래 용쓰고 그랬다는 말도 있었어”라고 설명했다.

자세한 이야기인 즉, 고문산은 예부터 사람이 하나 들어갈 만큼 굴이 뚫려 있었는데, 그 길이 몽탄강에 이른다고 해 먼 옛날 이 굴에는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지상에 내려 온 백년 묵은 이무기가 한 쌍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본래 용이었던 부부 이무기는 이 호수에 나와 목욕재계하고, 다시 용이 되기를 옥황상제께 빌었다고 한다.

그 정성이 지극해 마침내 옥황상제의 윤허가 있어 하늘로 승천하기에 이르렀다. 우레가 번득이며 소낙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숫용이 먼저 하늘로 승천하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 후 마을은 질병이 끊이지 않으며 가뭄 때문에 흉년을 면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암이무기의 저주라고 믿어 용신당을 짓고 용신제를 지내고 있다.

이로써 용이 승천하던 강을 용연이라 하고 그 강변마을을 용호마을이라 불리게 됐다는 설이 내려져 오고 있다.

옆에 앉아 있던 양정남(77)씨는 “근디 실제로 가뭄이 극심할 때 어른들이 제를 지내면 비가 내리고 가뭄이 끝난 적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사라진 용신제 풍습은 어느 샌가부터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했다.

[속금산…일본 가옥]과거 이야기가 새록새록 기억이 난 양승호씨는 “장군이 말 타고 가다 영산강 가기 전 말에서 떨어졌다는 마산이 있어. 거기에 칼이랑 투구가 다 있어”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마산이라 일컫는 ‘속금산(束錦山·173m)’은 학교면 금송리 서면에 위치한 자그마한 산이다. 뾰쪽하게 솟구친 형상을 하고 있으며, 산의 형상이 장군을 연상케 해 주위 옥마봉, 투구봉, 칼재 등 무인과 관련된 지명을 가지고 있다.

현재 속금산은 잘 등산로가 정비돼 등산코스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양정남씨는 “마을에 일제 강점기 때 일본지주가 살던 집도 있어. 그 집 주변에 중천포가 있는데 마을에 있는 쌀 전부 다 배로 실어서 보냈었지. 지금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라고 말했다.

동각에서 나온 후 배야 마을을 지나쳐 차로 5분 거리를 이동하니 실제 가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함평군 월호리 282번지 가옥 및 창고’는 일제 강점기 영산강 중천포 나루터 근처에 지은 일본인지주의 집과 창고이다.

2004년 12월 31일 등록문화재 제118호로 지정된 이곳은 곡물 수송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마을에서 수탈한 쌀을 이곳 창고에서 보관했다. 즉, 일제 수탈의 중심지인 것이다.

평온한 시골 마을에서 일본식 건축기법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곳은 과거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가옥에서 나와 길 따라 내려오니 보이는 중천포. 강가에 서서 맞은편에 보이는 나주 공산면. 강을 끼고 나뉜 두 지역 사이에서 서서 넓은 강을 바라보자니 느낌이 사뭇 달랐다. 용호마을 과거 이야기 속엔 ‘강’의 존재는 빠지지 않는 듯하다.

[‘추억의 사랑방 사탕을 꺼내 맛보듯’]마을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펼쳐진 논 사이로 비닐하우스도 몇 동 보였다. 알고 보니 용호마을 사람들이 무화과 재배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약 20여 년 동안 무화과를 재배해왔으며, 무농약 유기농 재배 농가도 3곳이나 된다.

농번기가 시작돼 논과 밭으로 나가 구슬땀을 흘리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벌써 벌겋게 익었다. 저 멀리 마을 윗길서 들려오는 오토바이 소리가 가까이 들릴 만큼 조용하고 평온한 용호마을. 추억의 사랑방 사탕을 꺼내 맛보듯, 다시 한 번 마을에 들러 지난 역사를 하나씩 꺼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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