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당마을주민들

마을 가는 길어느새 포근한 봄기운이 불쑥 들어선 지난 16일 기자는 군서면 만곡리에서 22번 국도를 타고 영당마을로 향한다.

묘량로에서 평탄하게 직진해 쭉 따라가 보니 어느 새 저 멀리 영당마을이 보인다. 멀리서 보이는 마을은 산을 등지고 있지만 한 눈에 띄는 한옥 가옥들이 듬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마을로 향하는 도로를 천천히 달리다 보면 5개의 비석이 즐비어 있다. 각 돌비석마다 사연이 있는 듯 해 보인다. 조금 더 들어가 보니 마을 입구에 손님을 반갑게 맞이하는 듯 해 보이는 장승들이 어엿하게 서 있다. 각 장승마다 마을의 전통과 오랜 세월을 풍기는 듯 하다.

영당마을 사람들전남도가 2007년 1월 22일 지정한 한옥보존시범마을답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오랜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한옥 집이 몇 채 보인다. 마을 중간에 장엄하게 위치한 묘장 서원은 수백 년간 전통을 이어가는 마을의 특징을 보여준다.

마을 회관에 도착하자마자 안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린다. 대한 노인회 강사님이 이날 마을을 찾아 주민 분들께 무료 강습을 하고 계셨다. 마을 어르신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박수도 치시는 모습에 마을의 활기 찬 분위기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둥그렇게 둘러 앉은 마을 어르신께 마을 소개를 부탁드렸다.

마을에서 촌중 유사로 불리시는 이진선 어르신은 "마을 앞에 바로 보이는 비석만 봐도 우리 마을을 한 눈에 알 수 있어, 여기가 전주 이씨 집성촌이여"라며 마을의 유래와 역사를 설명하신다.

전주이씨도유사이신 이평신 회장님은 ‘마을 주민 전부다 전문 (농악)악사제. 다른 마을 당산제도 도와주러 가기도 했고 대상도 많이 탔제’라며 옛 기억을 떠올리셨다.

이어 "이장님이 마을을 위해 큰 역할 했제. 폐교 될 뻔한 묘량중앙초를 다시 살려 낸 거 아니여"라며 이장님을 칭찬하신다.

최근 정원 미달로 폐교 될 뻔한 묘량중앙초를 이장님께서 귀촌하신 분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힘을 모아 학교를 다시 살려내셨다고 한다. 현재 유치원생까지 합쳐 학생 수가 80명이 넘는다고. 현재 운당1리로는 80가구가 거주하며, 163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영당마을 가구 수는 현재 50호이다.

마을 주민 모두가 토박이인 이곳은 마을 사람끼리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정도로 돈독하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쌀, 콩, 땅콩, 고추 등 농업을 주로 하신다. 특히 농사가 주업인데 품앗이 같은 경우 기계로는 한계가 있어 수작업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마을 어르신들이 연로하셔서 점점 일적인 부분에 안타까운 부분도 많다고 한다.

전통과 역사를 가진 것에 비해 나날이 연로해지시는 마을 주민들을 걱정하시는 이장님은 앞으로 10~20년 후의 마을을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크셨다.

강정원 마을이장님께서는 ‘최근 마을 안에 행복마을을 10채 지었습니다. 현재 부지를 마련하고 있어 올해 이곳으로 이사 오겠다는 분들도 계셔요. 귀촌하시는 분들이 늘어나는 추세라 앞으로 지속가능한 마을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라고 말했다.

문중도유사이신 이평신 회장님의 안내를 따라 묘장서원 곳곳을 둘러본다. 묘장서원과 한옥집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보니 큼직한 고인돌 4개를 발견한다. 옛날부터 존재한 이 고인돌은 누가 옮겼는지, 어떻게 생겨났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고인돌의 존재는 아직도 미스테리라 마을 분들이 그 자리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황금빛 토지가 넓게 펼쳐진 언덕에서 바라본 영당마을 전경은 특유의 평안함과 정겨움을 물씬 풍긴다. 기자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영당마을 탐방을 마쳤다.

마을유래마을 뒤에 대형지석묘가 있는 것으로 봐서 선사시대부터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전주이씨 양도공파(全州李氏 襄度公양동공) 후손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전주 이씨 집성촌인 이곳은 원래 하남골이라 불리었다.

영당(影堂)은 ‘그림자를 모신 집안’을 의미하는데 묘장서원 영당사에 조선 초기 개국공신 양도공 이천우의 영정을 모신다고 해 영당이라고 한다. 마을이 영정을 모시게 되면서 영당마을로 명칭이 바뀌었다.

묘장서원영당마을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묘장 서원은 2004년 2월 13일에 지정된 전남문화재자료 제 249호이다. 1616년에 건립된 묘장서원은 조선 초의 개국공신인 양도공 이천우(李天祐 1354∼1417)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이성계의 조카인 이천우는 이성계 휘하에 들어가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해 조선개국에 공을 세웠다. 또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우고 태종의 즉위를 위해서 많은 공헌을 하여 정사공신과 자명공신에 훈록되었던 인물이다.

태종은 1416년 이천우의 공적을 치하하여 화공으로 하여금 이천우의 화상(畵像)과 이응도(二鷹圖)를 그리게 했는데 이로 인해 묘장영당이 건립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대대로 영정을 보관하다가 이천우의 증손인 부사맹 이효상(李孝常)이 담양으로부터 영광 묘량면 영양리 당산마을로 이주·정착하면서 부조묘를 건립하고 영정과 함께 포총교지, 이응도, 공신회맹축 등 유품을 보존하였다고 한다.

현재 향교의 유림이 사당을 찾아 매년 2월 중정, 8월 중정 때 제를 지내고 있다.

당산제예로부터 전하여 오는 세시풍속으로 정월대보름에 집집마다 줄을 하나씩 가져와 다 같이 줄을 꼬며 농악대와 함께 마을 한 바퀴를 돈다. 마을 자체로 음력 정월에 보름굿과 함께 줄을 틀며 당산제를 지내는데 농악대와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샘굿, 줄굿, 당산제 의식까지 치른다.

마을 한 바퀴를 돈 후, 줄다리기를 하는데 3판 경기에서 남녀로 편을 갈라 여자가 2판 이기면 풍년이 온다고 해 여자가 이긴다. 경기 후 장승배기의 수살에 줄을 감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농사를 기원하는 당산제를 지낸다. 마을엔 지금까지 이 풍습이 그대로 행해지고 있다.

유두절유두의 어원은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약자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한다는 뜻이다. 유두절은 신라 때부터 있었던 세시풍속으로 농촌에서는 모내기를 마친 후 술을 마시며 노는 날로 알려져 있다. 영당마을의 유두절도 마을 자체로 쉬는 날로 정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음력 칠월 닷새 날 집집마다 막걸리와 음식을 준비하며 축제 분위기로 즐겁게 쉬었다고 한다. 민송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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