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가는 길
77번 국도를 타고 답동마을을 지나 백수해안도로 방향으로 계속 직진해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다 보면 도로 중간에 위치한 동백마을 비석이 보인다. 비석 옆에는 영화 마파도 촬영지라고 표시된 표지판도 있다. 표지판 왼쪽에 비탈길처럼 나있는 내리막 길 사이로 쭉 내려가다 보면 동백마을 마을회관이 제일 먼저 보인다.동백마을의 유래
조선시대초에 영광정씨가 이 마을에 입촌하여 현재에 까지 이르고 있으며 나라정씨는 임진왜란때 이곳으로 피신해 오늘에 까지 살고 있다.마을의 형태가 동백꽃처럼 생겼다하여 동백이라 불러졌다고 전한다. 현재 동백나무가 동네 해변에 약 200여그루 자생하고 있으며 동백골이라 한다.
칠산바다의 전설
마을 앞에 보이는 칠산 바다는 일곱 개의 섬이 이뤄진 바다라 해서 칠산바다이다. 설화에 의하면 옛날 칠산바다는 원래 육지이고 일곱 골이 있었는데 서씨 노인이 한 나그네로부터 ‘돌부터의 귀에서 피가 흐르면 살고 있는 마을이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들었다.서 노인과 서씨의 말을 믿은 사람은 돌부처에 피가 난 것을 본 후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날 저녁 칠산 고을은 바다로 변했고 서씨의 말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바다에 잠겼다.
그 후 일곱 개의 산봉우리는 가득 찬 바닷물로 인해 일곱 개의 섬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당산제와 당산나무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위한 제의인 당산제는 마을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즐김으로써 축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과거에 동백마을에 인구가 많았을 적엔 정월대보름 때 농악대를 부르고 마을사람 마다 당산 나무에 감을 새끼줄을 꼬면서 굿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새부터 마을에 인구가 점차 줄어들면서 지금은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또 당산제의 중심인 당산나무는 예로부터 마을 지킴이로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모셔지는 신격화된 나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마을 안에 몇 그루 심겨 있었던 당산 나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베어져 현재 한 그루의 당산 나무가 남아있다.
동백마을 사람들
추위가 사그라들고 봄 기운이 왕성해진 지난 9일 마파도 촬영지로 유명한 동백마을을 방문했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무더위 심터’라고 노란 표지판이 붙여진 마을 회관이 눈에 바로 띈다. 마을 회관 안으로 들어가자 몇 안 되는 어르신들께서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다른 어르신들은 일이 있어 오늘 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곤 날씨도 추운데 커피 한 잔 하라며 따뜻한 커피를 내주셨다.마을 소개를 부탁드린다는 기자의 말에 마을 이장을 맡고 계시는 주만철씨와 어르신들께서 마을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마을 앞 보이는 칠산바다에 대해 이장님께서는 “칠산바다를 지나 북상하는 굴비가 알이 70~80% 찼을 때라 그 때 굴비가 가장 맛이 좋아요. 칠산바다에서 잡은 굴비가 유명하죠”라며 예전에는 마을에 어업인구도 많았다고 한다.
평균 80대 후반이신 할머니들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리셨다.
일촌댁 은순례 할머니는 “마파도 촬영 땐 들어가도 못했어. 그땐 사람이 바글바글 했제...”라며 마파도 촬영 당시를 설명했다.
“강호동이도 왔었어. 지가 떡국도 끓여서 다 떠줬어” 심평댁 김정임 할머니의 말을 이어 덕산댁 정중순 할머니도 “방송국사람들이 우리 서울도 데려가서 식사대접도 해주고 선물도 주고 갔어”라며 그 후에도 여러 방송국에서 마을에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과거엔 마을 주변 산 밑으로 거의 밭일 정도로 밭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층이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몇 안 되는 가구가 마을에 남아있어 몸이 편찮으신 어르신들도 이젠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동백마을은 과거 가구 수가 30~40호 정도였으나, 현재 12여 가구 16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회관을 나오면서 당산나무, 칠산바다, 마파도 촬영지 등을 촬영하며 마을탐방을 마쳤다.
민송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