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가는 길

▲ 마을입구 동백마을 비석
▲ 마을회관
77번 국도를 타고 답동마을을 지나 백수해안도로 방향으로 계속 직진해 구불구불한 길을 달리다 보면 도로 중간에 위치한 동백마을 비석이 보인다.
▲ 마파도 촬영지
비석 옆에는 영화 마파도 촬영지라고 표시된 표지판도 있다. 표지판 왼쪽에 비탈길처럼 나있는 내리막 길 사이로 쭉 내려가다 보면 동백마을 마을회관이 제일 먼저 보인다.

동백마을의 유래

조선시대초에 영광정씨가 이 마을에 입촌하여 현재에 까지 이르고 있으며 나라정씨는 임진왜란때 이곳으로 피신해 오늘에 까지 살고 있다.마을의 형태가 동백꽃처럼 생겼다하여 동백이라 불러졌다고 전한다. 현재 동백나무가 동네 해변에 약 200여그루 자생하고 있으며 동백골이라 한다.

칠산바다의 전설

▲ 칠산바다
마을 앞에 보이는 칠산 바다는 일곱 개의 섬이 이뤄진 바다라 해서 칠산바다이다. 설화에 의하면 옛날 칠산바다는 원래 육지이고 일곱 골이 있었는데 서씨 노인이 한 나그네로부터 ‘돌부터의 귀에서 피가 흐르면 살고 있는 마을이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들었다.

서 노인과 서씨의 말을 믿은 사람은 돌부처에 피가 난 것을 본 후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 날 저녁 칠산 고을은 바다로 변했고 서씨의 말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바다에 잠겼다.

그 후 일곱 개의 산봉우리는 가득 찬 바닷물로 인해 일곱 개의 섬이 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당산제와 당산나무

▲ 당산나무
마을의 풍년과 평안을 위한 제의인 당산제는 마을사람들 모두가 참여하여 즐김으로써 축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과거에 동백마을에 인구가 많았을 적엔 정월대보름 때 농악대를 부르고 마을사람 마다 당산 나무에 감을 새끼줄을 꼬면서 굿을 준비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새부터 마을에 인구가 점차 줄어들면서 지금은 당산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또 당산제의 중심인 당산나무는 예로부터 마을 지킴이로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모셔지는 신격화된 나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마을 안에 몇 그루 심겨 있었던 당산 나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베어져 현재 한 그루의 당산 나무가 남아있다.

동백마을 사람들

▲ 동백마을 사람들
▲ 주만철 백암리 이장
▲ 신평댁 김정임 씨
일촌댁 은순례 씨
덕산댁 정중순 씨
추위가 사그라들고 봄 기운이 왕성해진 지난 9일 마파도 촬영지로 유명한 동백마을을 방문했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무더위 심터’라고 노란 표지판이 붙여진 마을 회관이 눈에 바로 띈다. 마을 회관 안으로 들어가자 몇 안 되는 어르신들께서 옹기종기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다른 어르신들은 일이 있어 오늘 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곤 날씨도 추운데 커피 한 잔 하라며 따뜻한 커피를 내주셨다.

마을 소개를 부탁드린다는 기자의 말에 마을 이장을 맡고 계시는 주만철씨와 어르신들께서 마을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마을 앞 보이는 칠산바다에 대해 이장님께서는 “칠산바다를 지나 북상하는 굴비가 알이 70~80% 찼을 때라 그 때 굴비가 가장 맛이 좋아요. 칠산바다에서 잡은 굴비가 유명하죠”라며 예전에는 마을에 어업인구도 많았다고 한다.

평균 80대 후반이신 할머니들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떠올리셨다.

일촌댁 은순례 할머니는 “마파도 촬영 땐 들어가도 못했어. 그땐 사람이 바글바글 했제...”라며 마파도 촬영 당시를 설명했다.

“강호동이도 왔었어. 지가 떡국도 끓여서 다 떠줬어” 심평댁 김정임 할머니의 말을 이어 덕산댁 정중순 할머니도 “방송국사람들이 우리 서울도 데려가서 식사대접도 해주고 선물도 주고 갔어”라며 그 후에도 여러 방송국에서 마을에 많이 다녀갔다고 한다.

과거엔 마을 주변 산 밑으로 거의 밭일 정도로 밭농사를 많이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층이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몇 안 되는 가구가 마을에 남아있어 몸이 편찮으신 어르신들도 이젠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동백마을은 과거 가구 수가 30~40호 정도였으나, 현재 12여 가구 16명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 회관을 나오면서 당산나무, 칠산바다, 마파도 촬영지 등을 촬영하며 마을탐방을 마쳤다.

민송이 기자

저작권자 © 우리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