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및 환경

읍 소재지에서 호남선 철도를 따라 북쪽으로 1.5km쯤 올라가서 장안교를 지나면 장안리에 이르는데 장안리는 장안리는 봉암, 월봉, 장재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입암산 일맥이 성미산, 구봉산을 거쳐 안평리 뒷산을 지나와 장안리에서 끝나는데 구봉산 일지맥이 안평리 뒷산을 지나면서 봉암산과 비안간으로 갈라지면서 이룬 골짜기 안쪽에 봉암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서삼면과 안평리로 경계를 지으며 서쪽으로 흘러온 개천과 동남쪽을 돌고 흐르는 황룡강이 마치 마을을 감사 안은 것처럼 남쪽에서 합류하고 있어 황룡강을 경계로 동쪽에 수산리 서쪽에 서삼면 남쪽에 장성읍 시가지가 각각 위치하고 북족으로는 안평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강 안쪽으로는 비옥한 역보들이 조성되어 있다.또한 마을 서편으로는 호남선 철도가 지나고 있으며 1985년부터 철도 옆길로 장성- 신흥간 군내버스가 운행되고 있다.

마을유래

봉암마을 앞에 지석묘(고인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것 같으나 자세한 것은 상고해 볼 수 없으며 마을 이름이 기록된 문헌기록으로 보아 정유재란후 1600년 오산, 진원 두현이 합현 되면서 장성향교가 이곳으로 옮겨 왔다가 다시 165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간 것으로 알 수 있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 읍서면조에 장안, 봉암이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 읍서면조에 봉암, 월봉 2개 마을이 기록되어 있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수산리, 봉암리, 내기리, 월봉리 각 일부를 포함한 장안리가 장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6년 장성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마을에서 가장 오래 거주하는 성씨는 황주 변씨이다.

인물

변이중(1546~1611) 본관 황주. 자 언시. 호 망암. 장성출생. 이이의 문인. 1568년(선조1년) 사마시를 거쳐,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 소모어사가 되어 병마·군기를 수습하고, 수원에 주둔하여 기호의 적에 대비하였다. 그 뒤 조도사가 되어 양천에서 전공을 세우고, 기존 화차를 개량해 한 번에 수백 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춘 화차 300량을 만들어 권율에게 주어 행주대첩에 크게 기여하였다. 독운사를 지내면서 군량 수십만 석을 조달, 명나라 군대에 대주었다. 1603년 함안군수로 갔다가 2년 뒤 사임하고, 장성에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이조참판에 추증, 장성 봉암서원에 제향됐다. 그의 화차 제조는 조선 과학사에 있어서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문집에 《망암집이 있다. 매년 봉암서원에서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추향제가 봉행되고 있다.

유물·유적

봉암서원(기념물 제54호)봉암서원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화차를 발명 행주대첩의 전공을 세웠던 변이중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1697년(숙종23년) 호남유림의 공의로 변이중 선생의 유허인 장성읍 장안리에 봉암서원을 창건, 이듬해 망암 변이중 선생과 선생의 아들이며 광해조 때 이이첨 등 간신을 상소, 공박했던 자하 변경윤의 위패를 봉안하다가 1728년(영조4년) 정유재란 때 입암산에서 순절한 율정 윤진 장군과 숙종 때의 학자 청류당 변휴를 추배했으며 1798년(정조22년)에 3중창 했다. 1869년(고종5년)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됐다가 1974년 복설을 위한 본손회의를 열고 1977년 장성향교에서 유림회의를 개최하여 봉암서원 복원추진위를 구성, 1984년에 복원했다.

영사정마을 입구 우측 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황주변시 입향조인 변정이 지은 정산정(본래 이름)에서 비롯되었고 그 후 후손들이 강학당으로 이용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930년경에 중건했고 선현을 사모한다는 의미의 영사정으로 이름을 바꿨다. 영사정은 정면 3칸, 측면3칸 골기와의 팔작지붕으로 주위에 담장이 처져 모두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봉암석불봉암산 중록에 있는 석굴에 위치하며 이 굴이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있는 형국이어서 마을에 호환이 많아 어느 도승의 말을 따라 이 석불을 만들어 세운 후부터는 호환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석불은 현재 금박으로 도금되어 있었다. 봉암석불 혹은 장안리 미륵불로 불려 지는데 현재에도 인근 주민들이 공을 들이는 성소로 이용되고 있다.

지석묘(고인돌)마을동편 산자락에 위치한 봉암서원 앞 황주변씨 문중소유 논에 2기가 있고 서원 앞에 1기가 있는 등 마을 곳곳에서 지석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봉암마을 사람들

지난 15일 오후 봉암서원 앞에서 변동선(80) 할아버지를 만났다. 봉암석불과 지석묘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 주며 사진찍기를 거부하시다 끝내 사진촬영에 응하시면서 마을회관에 가면 할멈들이 많다고 친절히 알려주신다.봉암서원을 뒤로 하고 마을 보호수인 느티나무를 지나 마을끝자락에 다다르자 강미숙(57)씨가 무슨 일로 왔냐고 묻는다. 석불과 지석묘 촬영 중 장씨는 지석묘가 보는 각도에 따라 독수리, 두꺼비, 거북의 형상이라고 설명한다. 232개로 이어진 돌계단을 오르니 봉암석불의 모습이 보인다. 원래 석불이었는데 관리자인 강씨가 너무 지저분해서 금박을 입혔다. 석불뒤로는 동굴의 형상만 남고 다 묻혀진 동굴입구만 보였다. 마을회관에 가니 여자노인당으로 착각할 만큼 여성분들만 계셨다. 이 마을은 원래 남성이 귀하다면서 13세에 시집온 심금순(83)씨가 말한다. 서삼면 증암이 고향으로 13남매를 낳아 다는 심씨는 부모님이 일본사람들에게 딸을 뺏길까봐 13세에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호산댁으로 불리는 최귀례(76)씨는 29살에 혼자되어 4형제를 키우면서 힘들었지만 모두 결혼해 행복하다고 했다.동화면이 친정인 박병(83)씨는 “작년 가을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마침 지나가는 변강섭씨가 발견해 병원에서 치료받고 지금은 건강하다”고 하면서 “변강섭씨가 생명의 은인”이라며 감사함을 전했다.이밖에도 나주 노안면이 친정인 등머리댁 김홍순(77)씨, 초곡댁 옥춘기(76)씨, 심상애(83)씨등 오늘도 마을회관에 모여 사람 사는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저작권자 © 우리군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